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문단 편집) == 1차 투하 -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시|히로시마]] == Atomic bombing of Hiroshima 広島市への原子爆弾投下 [youtube(3wxWNAM8Cso)] [[파일:508px-Atomic_cloud_over_Hiroshima.jpg]] [youtube(n_A8LPtuX5c)] >'''A short time ago, [[B-29|An American airplane]] dropped [[리틀 보이|one bomb]] on Hiroshima, and destroyed its usefulness to the enemy. That bomb has more power than 20,000 tons of TNT…(중략)''' >'''방금 전, [[B-29|미국 폭격기 한 대]]가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한 발의 폭탄]]을 투하했고, 적에게 충분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 폭탄은 TNT 2만톤 이상의 당량을 가지고 있으며… ''' >---- > - [[해리 S. 트루먼]] [[히로시마시|히로시마]]는 일본에서 여덟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1944년 2월 당시 35만명)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제2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까지 폭격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 <[[맨발의 겐]]>에 표현된 것처럼 [[호위기]]들이 [[구레 군항 공습|옆동네 폭격]]을 지원하러 기총소사를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와 옆동네 [[구레시|구레]]도 초토화가 되는 와중에 구레 군항의 보급창이라 할 수 있는 히로시마는 너무나도 조용했다. 전쟁이 끝나고서야 알게 된 사실은 위 문단에서 설명된 것처럼 원자폭탄 최우선 폭격 목표로 일찌감치 정해져 있었고, "다른 폭격기는 손 대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던 덕분에 통상 폭격을 안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히로시마 사람들은 이런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우습게도 "트루먼 대통령의 어머니가 히로시마에 포로로 갇혀 있으며 이 때문에 히로시마는 살려두라고 미국 대통령이 직접 명령을 내렸다."라는 [[유언비어]]가 돌기도 했다.[* 스티븐 워커, 위의 책, p. 181. 트루먼 대통령의 모친은 히로시마에서 10,500km 떨어진 미국 미주리 주 그랜뷰에 살고 있었다. 참고로 트루먼 대통령의 모친은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된 [[1947년]] 향년 95세로 세상을 떠난다.] 폴 티비츠 대령은 1945년 8월 4일 대원들을 소집하여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작전 전 브리핑을 하면서 원자폭탄의 위력과 작전 개요를 공개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원자폭탄 투하는 처음부터 히로시마만을 유일한 목표로 하여 출격한 것은 아니다. 당시 작전에 따르면 제1 폭격 목표는 히로시마, 이어서 고쿠라, 나가사키 순서로 총 3개 도시가 목표였다. 당시에나 지금이나 폭격기가 1차 목표만을 받아 출격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 전략 폭격은 목표의 기상 문제 등을 고려하여 제2, 제3의 예비 목표를 여럿 받아 출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 [[파일:gettyimages-542402152-2048x2048.jpg|width=100%]] || || 히로시마 폭격 작전을 브리핑하는 폴 티비츠 대령(오른쪽)과 딕 파슨스 대령(왼쪽). 1945년 8월 4일 오후 4시 || 작전에 투입된 제509 혼성 전대 제393 폭격비행대대 소속의 B-29는 총 7대였다. * '''기상관측기 3대'''. 타격대보다 1시간 먼저 날아가 목표 도시의 날씨를 확인하고 보고하는 임무를 받았다. 당시에도 이미 레이더 폭격 기술이 있었지만, 폴 티비츠 대령은 "이 신형 폭탄은 너무나 귀중한 것이므로 폭격수가 무조건 육안으로 확인하고 폭격해야 한다."라는 엄명을 내렸다. 따라서 타격대에 앞서 목표 도시의 기상을 미리 관측할 필요가 있었다. Jabit III(호출부호 빅터 71)는 고쿠라, Full House(호출부호 빅터 83)는 나가사키, 그리고 Straight Flush(호출부호 빅터 85)가 히로시마를 맡았다.[* 원래 제393 폭격비행대대의 호출부호는 빅터였으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작전에서는 보안을 위해서 임시로 dimple(보조개)이라는 단어로 호출부호를 변경했다. 본 문서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당초 호출부호 빅터로 통일하여 서술한다.] * '''예비기 1대'''. 이 기체는 티니안과 일본 본토의 중간에 있는 [[이오 섬#s-1.|이오지마 섬]]으로 가서 대기하다, 다른 작전 투입 기체가 고장나는 등 만약의 경우 임무를 교대하는 것이 역할이었다. 여기 투입된 기체는 Top Secret(호출부호 빅터 72). * '''타격대 3대'''. 두말 할 것 없이 작전의 핵심이었다. 호출부호 빅터 91은 폭격 장면을 촬영하고 관측하는 역할이었다.[* 왜 촬영 관측기가 따로 필요했냐면, 뒤에 나오는 것처럼 원자폭탄 투하 담당기와 폭발력 계측기는 폭탄 투하와 동시에 급선회하여 전속력으로 도망쳐야 했기 때문에 사진을 제대로 촬영할 수 없었다.] 이 기체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에는 기체명이 없었으며, 나중에 Necessary Evil(필요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찰스 '척' 스위니(Charles Sweeney) 대위가 조종하는 [[https://en.wikipedia.org/wiki/The_Great_Artiste|The Great Artiste]](호출부호 빅터 89)[* The Great Artiste(위대한 예술가)는 509 혼성전대 393 폭격비행대대에서 에놀라 게이, 스트레이트 플러쉬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기체 중 하나였다. 이러한 기체명이 붙은 이유는 이 B-29의 폭격수였던 Kermit Beahan 대위의 2가지 솜씨가 그야말로 예술이라서. 하나는 [[노든 폭격조준기]] 다루는 솜씨이고 [[헌팅|다른 하나]]는... 원래 작전 계획에는 1차 원폭 투하는 에놀라 게이, 2차 원폭 투하는 위대한 예술가가 담당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후술하는 것처럼 1차 원폭 투하에서 위대한 예술가가 폭발 관측/계측 임무를 맡으면서 온갖 장비를 덕지덕지 설치해놓았는데, 불과 며칠 뒤 2차 작전을 하려다 보니 이들 장비를 떼어내서 다시 다른 기체에 설치하는 것이 너무 시간이 걸린다는 문제점이 나타났다. 결국 위대한 예술가를 조종하던 척 스위니 대위 팀만 '복스카(BocksCar)'로 옮겨가고, 복스카를 조종하던 프레드릭 복스 대위 팀이 위대한 예술가로 옮겨와서 2차 원폭 투하 작전에 참여했다. 그리하여 결국 2차 원폭 투하의 영광은 복스카 기체가 가져가고 위대한 예술가는 사람들이 거의 모르게 되었다. 미국 미주리 주 화이트맨 공군 기지에는 The Great Artiste 노즈아트를 그린 B-29가 전시되어 있으나, 이 기체는 노즈아트만 그려넣은 다른 기체이다. 진짜 The Great Artiste는 1948년에 훈련하다가 착륙 도중 크게 부서졌고, 결국 1949년에 스크랩 처리 되었다.]는 원자폭탄 폭발력 계측이 임무였다. 이를 위해 여러 계측 장비를 추가로 설치했으며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자들이 탈 예정이었다. 몇십 년 뒤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루이스 월터 앨버레즈|루이스 앨버레즈]]도 이날 The Great Artiste에 타고 출격했다. 찰스 스위니 대위는 3일 뒤 나가사키 투하 작전에서 Bockscar(호출부호 빅터 77)를 조종하여 원자폭탄을 직접 투하하는 영광을 안게 된다. 타격대의 주인공은 [[리틀 보이]]를 싣고 목표물에 투하하게 될 Enola Gay(호출부호 빅터 82). 에놀라 게이의 이름이 붙여진건 출격 바로 전날임은 앞서 서술한 바와 같다. || [[파일:509th-Composite-Group.jpg|width=100%]] || || 출격 직전 기념 사진을 촬영한 에놀라 게이 승무원들 ||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항법사 Theodore J. 'Dutch' Van Kirk 대위, 세번째: 폭격수 Thomas W. Ferebee 소령[* 본디 폭격수는 [[부사관]]이 배치되지만 여기에는 이렇게 높은 장교가 배치되었는데 그 이유는 [[원자폭탄|이 폭탄이 단 한 방으로 나라를 멸망시키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네번째: 제509 혼성 전대장이자 이날 작전 기장 Paul W. Tibbets 대령, 다섯번째: (이날만) 부기장 Robert A. Lewis 대위.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후미 기총수 George R. 'Bob' Caron 중사. 장교들 외에 밥 캐런 중사를 따로 언급하는 이유는 작전 성공 직후 전세계에 뿌려졌고, 어디선가 봤을 '상공에서 촬영한 히로시마 원폭 폭발 장면 사진'이 바로 이 사람이 찍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최종 기념 사진에는 승무원 2명이 빠져있다. 병기사 Morris R. Jeppson 중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인물이자 이 작전의 실질적 지휘관인 윌리엄 파슨스 대령이다. 원래 이런 작전일수록 기밀을 유지하면서 출격해야 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미국 국민들의 세금이 아낌 없이 들어간 원자폭탄의 위력을 최대한 홍보하기 위해서 맨해튼 계획의 총책임자 그로브스 소장은 티니안 기지에서 에놀라 게이가 출격하는 장면을 보도진에 공개했다.[* 생중계는 아니었고, 나중에 원폭 투하 성공 이후에 홍보 뉴스에 쓰기 위함이었다.] 덕분에 수많은 영화 촬영 기사들과 신문 기자들이 몰려들어 승무원들은 물론 에놀라 게이 기체를 열심히 찍어댔다. 이때의 촬영이 얼마나 요란했는지 어떤 부대원은 '마치 [[할리우드]] 영화 시사회 같았다'고 증언했다. 부대장 폴 티비츠 대령은 이때의 광란을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MGM/UA|사자가 격납고 앞 광장으로 걸어 나오거나]], [[20세기 폭스|하늘 높이 광선이 뻗쳐오를 줄 알았다.]]"'''[* 스티븐 워커, 위의 책, p. 270.] 위의 출격 직전 기념 사진은 바로 이때 찍힌 것이다. 이러한 광란 끝에 1945년 8월 6일 새벽 2시 45분 에놀라 게이는 리틀 보이를 싣고 마침내 역사적인 출격을 감행한다. 실제 폭탄이 너무나 무겁기도 했고 가득 채운 연료 때문에 이륙 중량 초과였다고 한다. 더 충분한 활주 속도를 얻기 위해 티비츠 대령은 활주로 거의 끝에까지 가서야 겨우 이륙을 시켰다.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은 에놀라 게이가 이륙을 안하고 계속 달려나가자 활주로 끝에서 충돌하는 것 아니냐며 숨도 못 쉬었다고. 심지어 에놀라 게이 부조종사 로버트 루이스 대위조차도 티비츠 대령이 이륙을 안하자 자신이 조종간을 당길 뻔했다고 술회했다. 이륙 후 약 10분이 지나 타격대가 순항 고도에 올라서자, 에놀라 게이의 조종사 티비츠 대령은 "판사님 일하러 가신다."라는 문장을 무전으로 송신했다. 이것은 파슨스 대령이 에놀라 게이 기내에서 원자폭탄 조립을 시작하겠다는 암호문이었다. 밤새도록 원자폭탄 조립을 반복 연습한 파슨스 대령은 병기사 모리스 젭슨 중사가 손전등을 비춰주는 가운데 굉음과 진동이 몰아치는 B-29 폭탄창에서 [[리틀 보이]]의 조립과 장전을 완벽하게 해냈다. 그리고 티비츠 대령은 에놀라 게이 기내에서 그들이 싣고 가는 신형 폭탄은 '원자폭탄'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처음으로 공표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투하 작전에서 대원들이 원자폭탄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폭격 1시간 30분 전, 모리스 젭슨 중사는 다시 폭탄창으로 가서 리틀 보이의 마지막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리틀 보이의 안전핀 제거 방법은 폭탄 후미의 녹색 플러그 3개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붉은색 플러그 3개를 꽂는 것이었다. 모리스 중사가 나중에 고백한 바에 따르면, 독실한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모르몬교]] 신자였던 그는 붉은색 플러그를 버려서 리틀 보이를 불발로 만들어 버릴까 아주 잠깐 고민했다고 한다.[* 스티븐 워커, 위의 책, p. 300.]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이제 리틀 보이는 완전히 활성화되었으며, 모리스 젭슨은 인류 최초의 실전 투입 원자폭탄을 마지막으로 만진 사람으로 기록에 남았다. 이러는 동안 1시간 먼저 출발한 기상관측기 3대는 각자의 목표 도시에 도달했다. 그런데 히로시마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제2 목표 고쿠라도 마찬가지였다. 청명한 하늘은 제3 목표 나가사키뿐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히로시마 하늘에서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B-29 스트레이트 플러쉬가 히로시마 상공을 가로지르는 동안 요격기도, 방공포화도 없었다. 스트레이트 플러쉬는 기상 상황이 좋으므로 제1 목표에 대한 우선 폭격을 제안하였다. 이 무선 보고를 수신한 에놀라 게이의 기장 폴 티비츠 대령은 "폭격 목표 히로시마"를 선언하였다. 이 상황을 히로시마의 시각에서 다시 구성해보면 우선 아침 7시, 기상관측 임무를 맡은 B-29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히로시마 상공에 나타났다. 많은 히로시마 시민들이 고고도에 유유히 떠있는 이 B-29를 목격했다. 공습 경보도 울렸지만 방공호로 대피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왜냐면 그 당시 일본 시민들은 B-29의 폭격은 보통 수백 대가 들이닥치는 것이고, 한두 대 출현하는 건 정찰 임무 같은 것이라서 별다른 피해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일본 군부와 국민들의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폴 티비츠 대령이 호위 전투기도 없이 B-29 두세대만 단독으로 보내서 원자폭탄을 투하하도록 하는 작전을 짜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약 1시간 뒤 아침 8시, 히로시마 상공에 다시 3대의 B-29(그레이트 아티스트, 빅터 91, 그리고 에놀라 게이로 구성된 본 타격대)가 나타났다. 다시 공습 경보가 울렸지만 역시 히로시마 시민들은 하늘 높이 떠 있는 B-29들을 힐끗 한 번 쳐다보고는 아침밥을 먹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나중에 히로시마 생존자들의 증언 기록을 보면 "B-29 두 대는 바짝 붙어서 앞서고 있었고(에놀라 게이와 그레이트 아티스트) 그 뒤에 또 한 대가 좀 떨어져서 뒤따르고 있었다(빅터 91)"고 하여 본 타격대의 포메이션까지도 정확히 기억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에놀라 게이는 최종 투하 직전 목표를 확인하는 절차를 밟았다. 티비츠 대령, 파슨스 대령, 항법사 밴커크 대위가 눈 아래 펼쳐진 도시가 최종 목표 히로시마임을 차례로 확인 복창하였다. 임무에 참여했던 모든 대원들은 [[여름]] 햇살이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아침 풍경이었다고 증언했다. 에놀라 게이는 고도 9,300m에서 폭격 항정(Bomb Run)에 돌입했다. 기장 폴 티비츠 대령은 조종간에서 손을 떼고 폭격수 토머스 페러비 소령에게 조종 권한을 넘겼다. [[노든 폭격조준기]] 항목에도 있지만, 이 폭격 조준기는 비행기의 자동 조종 장치와 연동되어 있어 폭격 항정 동안에는 폭격수가 기체 조종을 하게 된다.[* 유럽전선 전략 폭격을 그린 영화 [[멤피스 벨]]에도 [[B-17]] 폭격수가 조종을 넘겨 받아 폭격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페러비 소령은 히로시마 중심부 아이오이 다리를 조준하여 리틀 보이 투하 스위치를 눌렀다. 항법사 밴커크 대위가 비행일지에 기록한 정확한 투하 시각은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15초. 바로 뒤에 붙어서 따라오던 그레이트 아티스트는 동시에 계측 장치를 투하했으며, 빅터 91은 히로시마 외곽 상공에서 촬영 준비를 마치고 선회하고 있었다. 투하 직후 에놀라 게이는 우로, 그레이트 아티스트는 좌로 급선회, 전속력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앞에서 설명되어 있는 급강하 급선회 회피 기동이다. 투하와 동시에 충격파와 방사선 피해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한시라도 빨리 도망쳐야 했기 때문이다.] 8시 15분에서 막 16분으로 넘어가려는 찰나, 히로시마 상공 570m에서 '''인류 최초의 실전 투입 원자폭탄이 폭발했다.''' [youtube(au_fd4nYEHs)] 빅터 91이 촬영한 폭발 당시 영상 원자폭탄은 측풍으로 인해 원래 조준점이었던 T 모양의 아이오이 다리에서 약 240m 정도 빗나가 시마 외과병원 상공에서 폭발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꽤 많이 빗나간 것 같지만, 9,000m가 넘는 성층권에서 투하한 폭탄임을 감안한다면 놀라운 정밀도[* 이 정도의 폭격 오차는 대량의 폭탄을 일거에 투하해서 목표물 일대를 덮는 방식의 통상 폭격이라면 당연히 대성공의 범주에 들어간다.]였으며, 만약 단 한 발의 통상 폭탄이었다면 작전 실패였을 것이나 [[원자폭탄|'''리틀 보이는 일반적인 폭탄이 아니었다.''']] 우라늄 235 기반 포신형 원자폭탄 리틀 보이는 정상적으로 작동하였다. 방출 에너지량도 당초 예측대로였다. 다만 구조의 한계로 인해 비효율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나중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핵물질의 단지 1.7%만이 핵분열에 관여하였다.[* 유명한 군사 소설가 [[토머스 레오 클랜시 주니어|톰 클랜시]]의 소설 [[썸 오브 올 피어스|'공포의 총합'(베카의 전사들)]]을 보면, [[아랍]] [[테러리스트]]들의 핵폭탄 제조를 돕는 독일인 프롬 박사가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 보이를 가리켜 "그건 대부분의 핵물질을 낭비해 버린 것이었지"라고 비판하는 대목이 나온다.] 측정된 폭발력은 TNT 환산 16kt ± 2kt.[* 출처 : The Atomic Heritage Foundation, "The Bomb-Little Boy", 2007.] 바로 위의 영상에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15kt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폭탄이 터지는 순간 히로시마 시민들은 엄청나게 밝은 빛을 목격했다. 이 빛이 얼마나 강한지 생존자들은 '순수한 흰색'이라고 묘사하고 있으며, [[X선|손으로 눈을 가리니 '자신의 뼈'가 보였다]]고 한다. [[Subsurface scattering|인간의 살은 어느 정도 빛을 투과시키는데]], 가시광선만 해도 자기 뼈가 보일 정도로 강력했다는 얘기. 폭심지 근처의 온도는 열복사로 약 3,000~4,000도가 넘었는데 [[태양]]의 표면 온도가 약 6,000도이다. 폭심지 근처는 모든 것이 문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미쓰이스미토모은행|스미토모은행]]이 열기를 기다리며 은행 돌계단에 앉아있던 사람이 엄청난 열선을 받으며 계단에 찍힌 '''검은 흔적(원폭 그림자)'''은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 [[파일:vAvftFY.jpg|width=100%]] || [[파일:b4WgMod.jpg|width=100%]] || ||<-2> 원폭 그림자 || 한편 폭탄이 터진 직후 에놀라 게이의 승무원들은 방사선의 맛을 느꼈다고 한다. 납 맛이었다고.[* 당연히 방사선은 무색, 무취, 무맛이다. 이들이 느낀 맛은 방사선이 혀의 미뢰를 교란해서 생긴 '착각'이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체르노빌 사고]] 당시 주위를 시찰하던 조종사들과 방사성 폐기물을 치우던 인부들도 이러한 [[금속맛|금속 맛]]을 경험했다. 엄청난 빛에 이어진 것은 천지를 울리는 어마어마한 폭발음이었다. 통상적인 폭탄의 폭발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굉음. 종말의 포효였다. 이 때문에 히로시마의 생존자들은 원자폭탄을 '피카 동(ピカ ドン)'이라고 불렀다. 뜻을 번역하자면 '번쩍 쾅'이다. 많은 생존자들의 증언에서 가장 먼저, 가장 큰 인상으로 꼽은 것이 바로 이 천지를 울린 폭발음이었다. 뒤이어 잇따라 충격파로 인하여 최대 340m/s=1,224km/h=음속에 달하는 엄청난 폭풍이 주변 1.6km 내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인류가 기록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 역사상 최악의 [[토네이도]]의 중심 풍속은 불과 134.4m/s였다. 이 정도만 해도 어지간한 대도시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들이 거대한 돌무더기로 변해버린다. 이것은 토네이도의 경우이며 핵폭발의 경우 토네이도보다 에너지가 훨씬 빠르게 소멸되기 때문에 완전히 동일한 건 아니다. 이 범위 안에 있던 건물들은 [[히로시마 평화기념관|매우 튼튼하게 지은 건물]]을 제외하고 전부 완전히 붕괴되었다. 단 1발의 폭탄이 도시를 완벽에 가깝게 파괴하였다. 그 때가 출근 시간이었기에 효과는 더 컸다. 일례로 폭심지에서 불과 몇 백m 떨어진 은행에서는 일찍 출근해 두꺼운 석조건물의 가장 안쪽에 들어가 있었던 말단 여직원 2명을 제외하고 출근 중이던 다른 직원들은 모두 사망했다.[* 두 생존자 둘 중 한 명도 몇 시간 뒤 사망해버렸다는 얘기도 있으나, [[https://youtu.be/uqCHGIM4Kik|해당 생존자 인터뷰 영상]]에는 그런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 [[그라운드 제로|폭심지]]에 있었던 생존자 중에 '''노무라 에이조(野村英三)'''라는 남자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그는 당시 47세로 연료배급통제조합에서 일하던 직원이었는데, 그가 일하던 조합 건물은 폭심지에서 서남쪽으로 불과 170m 떨어져 있었다. 8월 6일은 월요일이었기에 아침 8시에 전 직원 조례가 있었고, 그 후 노무라는 직장 상사가 깜박 잊어버린 서류를 가지러 건물 지하 창고로 내려갔다. 리틀 보이가 폭발한 것은 노무라가 지하 창고로 들어간 직후. 알려진 바에 따르면 당시 조합 건물에는 직원 37명이 있었으나, 노무라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즉사했거나 병사 혹은 행방불명. 노무라는 원폭 생존자 중에서 폭심지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사람으로 인정 받고 있다. 그는 폭발 직후 폭심지 근처의 상황을 목격한 거의 유일한 생존자였기 때문에 나중에 많은 가치있는 증언을 남겼다. 당연히 많은 양의 방사선에 피폭되었기에 고열, 설사, 잇몸 출혈 등 피폭 후유증으로 생사를 넘나들었지만 끝내 목숨을 건졌고, 이후 뜻밖에도 84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노무라가 생존한 연료배급통제조합 건물은 현재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의 [[https://ja.wikipedia.org/wiki/レストハウス_(広島市)|'레스트 하우스']]로 남아 있다. [[파일:external/67.media.tumblr.com/tumblr_obwg8hrBOy1sqk8veo10_r1_540.jpg]] [youtube(av3kLzh0Fbc)] 히로시마 원폭 투하 전후의 모습.[* 사진 한가운데 T자형 다리가 바로 폭격 조준점 아이오이 다리이다. 뜻은 상생(相生)의 다리. 다리 남쪽 삼각형 지형에 있던 모든 건물은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원폭 폭발로 깨끗하게 지워졌다. 그곳은 [[히로시마 평화기념관|히로시마 평화공원]]이 되어 있다.] 충격파에 이어 화재가 들이닥쳤다. 바로 ''''폭격 후폭풍''''의 영향이었다. 도시에 대규모 폭격으로 불길이 일어나면 뜨거워진 대기가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이 때문에 아래 쪽에는 부분적인 진공이 형성된다. 이렇게 되면 그 진공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외곽에서 뚫고 들어오는 찬 공기가 도시 곳곳을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관통하게 되며, 이러한 폭풍은 곳곳의 불씨를 합쳐 대규모 화재로 만들어버린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을 정도의 강한 바람이 불어닥쳤다고 한다.[* 도시 외곽에서 들어오는 찬 공기와 불씨가 만나 거대한 화재선풍을 일으키는 이러한 현상은 잇시키 토키히코(一色登希彦)의 만화 [[일본침몰(만화)|'일본침몰']]에서도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화재는 히로시마 시내 중심부 11km^^2^^를 모두 삼켰다. 히로시마 시 전체는 열로 가득 찼고, 잿빛 대기가 태양마저 가려 사방이 밤처럼 어두운 가운데 사방팔방이 불지옥으로 변한 상태였다. [[불교]]의 [[지옥도]]나 [[단테의 지옥]]에서나 나올 법한, 현실에 나타난 문자 그대로의 '심판의 날'이었다. 높은 열로 인해 기온이 치솟은 히로시마의 대기는 지극히 건조해져 도시 전체가 초고온의 건식 사우나 같은 상태가 되었고, 사방에 널린 죽지 않은 부상자들의 신음소리, 비명소리와 함께 물을 달라는 절규가 끊이지 않았다. 피부가 녹아내린 채 물을 찾으며 방황하는 사람들, 온몸이 불타며 다리 밑으로 떨어져 물에 떨어진 불덩이처럼 산산조각나는 사람 모습 등 끔찍한 참상을 전하는 목격담이 전해져온다. 이 때 '''원폭 투하 직후의 참상'''을 찍은 몇 안 되는 사진들이 존재한다. 바로 '주고쿠 신문'의 사진기자였던 '마츠시게 요시토(松重美人, 1913년~2005년)'가 폭심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미유키 다리'에서 찍은 사진들이 그것이다. [[https://atomicphotographers.com/photographers/yoshito-matsushige|당시 촬영 사진들]]. 폭탄이 터진 후 약 3시간 뒤에 찍은 사진들이며, '''원폭 폭발 직후를 담은 유일한 사진들'''이다. 사진을 보면 화상에 의해 부상을 입은 히로시마 여자 상업 학교, 히로시마 제1중학교 학생들이 미유키 다리에 앉거나 서서 경찰에게 [[식용유]]로 치료를 받고 있다. 물론 화상에 식용유로 치료가 될 리는 없었고, 단지 통증을 덜어주는 미봉책일 뿐이었다. 사진을 찍은 요시토에 의하면 이 학생들은 온 몸에 화상 물집이 잡혀 있었고, 물집이 터지자 피부가 양탄자 조각처럼 늘어졌다고 한다. 학생들의 머리카락이 열기와 열풍으로 인하여 산발이 되어 있고 옷이 찢어져 있으며, 화상을 입은 팔을 치켜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피폭되었던 부상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마츠시게 요시토(松重美人)는 참상에 질려 차마 시신들의 사진을 찍지 못했고, 부상자들의 사진만 간신히 찍을 수 있었다. 24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필름을 넣고 나왔지만 찍은 건 7장의 사진뿐이었고, 그 중에서 5장만이 남았다. 그 스스로 나중에 밝힌 바에 따르면 충격에 약간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고. 요시토에 의하면 사진을 찍은 '미유키 다리' 양 옆으로 시신들이 쌓여 있었고, 폭심지에서 200m 떨어진 카미야초에 세워진 전차 안에는 벌거벗은 시신들이 15구가 넘게 누워 있었다. 그 외에도 그 날 본 죽은 사람들의 숫자는 셀 수가 없었다고 한다. 마츠시게 요시토가 찍은 사진 속에서 부상자로 등장하는 츠보이 스나오 역시 눈알이 빠져 흔들거리는 여자아이, 수족을 잃은 부상자들, 흘러나온 내장을 주워 담는 남자, 미유키 다리 너머 강 속의 수 많은 시신들을 보았다고 증언하였다.] 몇 시간 뒤 증발한 수분 및 좁은 범위 내의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유기 생물체가 모였던''' 상공으로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낙진|검은 비]]'''였다. 원자폭탄으로 모든 것이 타버리고 남은 재가 방사성 분진으로 올라갔다가 비에 섞여 내려온 것이었다. 이 시커먼 빗물은 고농도의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있었지만, 타는 듯한 갈증에 사람들은 입을 벌리고 빗물을 받아 마셨다. 예외도 많았지만 이들은 검은 비에 노출된 만큼 더 일찍 죽었다. 이 폭격으로 인해 [[의사]]와 [[간호사]]들도 무려 90% 이상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도시 주변부에서 살아남은 [[의사]]들은 나름대로 해보려 했으나 원자폭탄이 너무나도 효과적이었다. 끝없이 넘쳐나는 중환자들로 [[트리아지]] 같은 분류는 무의미했다. 피부가 녹아내린 환자의 화상 치료만 하더라도 약품은 턱없이 부족했다. 방사선 화상은 [[DNA]] 파괴를 일으켜 조직 재생이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방사선은 다른 조직도 파괴하여 신체 내외에서 출혈을 일으키며 혈관세포를 파괴하고, 위장관세포를 파괴해 [[구토]]와 [[설사]]를 끊임없이 하게 된다. 영양 흡수가 안 되니 아무리 먹여도 [[영양실조]]에 걸려 죽게 된다. 이토록 다량의 방사선에 피폭된 부상자들은 갖가지 끔찍한 증상에 고통을 호소하며 며칠만에 죽어갔다. 방사선 피폭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히로시마의 의사들은 무력감으로 고통 속에 죽어가는 환자들을 지켜보기만했다. 일부 의사들은 [[비타민 A]]을 주사하기도 하였는데 결과는 끔찍했다. 주삿바늘이 꽂힌 곳부터 살이 썩어 나가더니 그런 다음에는 예외 없이 죽는 것이었다.[* 런던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9월 5일자 1면 머리기사의 일부다. '원자병(Atomic Plague)', 부제는 '나는 세계에게 경고하기 위해 이 기사를 쓴다.' 호주 출신 윌프레드 버체트(1911~1983년)는 원폭 투하 후 히로시마에 들어간 최초의 서방 기자로, 당시 히로시마는 자신들이 왜 폭격을 맞았는지는 잊고 그저 백인이라면 무조건 증오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어리석은 증오에 맞서며 원자병의 참상을 폭로했다.] 이때 의사들의 경험은 방사선 피폭을 당하면 인체에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가, 이것에 의학적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데이터가 되기도 했다. 또한 이곳에 거주하던 조선인들도 피폭 되었는데 의사들은 조선인들의 구해달라는 울부짖음을 들었음에도 일본인들과 차별하여 그들을 후순위로 두거나 내버려 두었다. 14만 명의 사망자 중 군인이 20,000명이었다. 2총군 대부분이 사망했다. 이 중 상당수가 원폭에서 80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히로시마 성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일본군으로선 이 총군 병력의 피해도 심각한 일이었다. [[몰락 작전|미군의 본토 공격]]을 앞두고 일본군은 [[결호작전]]을 계획하였고, 2개의 총군이 각각 서일본과 동일본 지역을 맡았다. 히로시마의 2총군 사령부 및 산하 병력은 바로 이 서일본 방위 임무를 맡은 부대인데, 이 부대의 사령부가 통째로 소멸한 것이다.[* 조선 왕족 출신인 2총군 교육참모 [[이우]] 중좌를 포함하여 사령부 기간요원들도 거의 사망했고, 그날 늦게 출근했던 제2총군 사령관 하타 슌로쿠 원수는 목숨을 건졌다. 8월 14일, 히로히토는 당시 일본 국내에 있던 비황족 출신 원수 3명을 모두 소환하여 항복 여부에 대한 조언을 받는데, [[스기야마 하지메]], [[나가노 오사미]]와 달리 원폭 투하를 몸소 체감한 덕인지 하타만이 항복에 찬성하는 진언을 올렸다. 다른 2명은 히로시마를 보고서도 전쟁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다.] 10명 이상의 미군 포로들도 대부분 죽었다. 증언에 따르면 몇몇 포로는 살아남았는데 분노한 일본인들이 살해했다는 증언도 있고, 일본인 의사로부터 치료를 거부 받아 죽었다는 증언도 있다. 한편 폭발 직후 에놀라 게이는 사력을 다해 도주하고 있었다. 폭발의 반대 방향으로 비행하고 있었기에 최초의 폭발 장면과 버섯구름을 제대로 목격한 이는 B-29 꼬리 맨 뒤쪽에 있던 후미 기총수(Tail Gunner) 밥 캐런 중사 뿐이었다. 그가 찍은 7장의 사진이 히로시마 폭발을 상공에서 촬영한 최초의 것이다. 정작 폭발을 계측하라고 보내놨던 그레이트 아티스트에서 찍은 사진은 제대로 나온 게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 안전거리에 들어서자 폴 티비츠 대령은 다른 대원들도 폭발 현장을 볼 수 있도록 에놀라 게이의 비행 방향을 조금 틀었다. 거대한 버섯구름과 그 밑에 통째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도시를 목격한 대원들은 "이제 전쟁은 끝난 거나 다름 없다.(항법사 밴커크 대위)"라거나 "우리가 티니안에 귀환하기도 전에 일본은 백기를 들 것(부기장 루이스 대위)"이라고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너무나 엄청난 위력과 그것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 투하했다는 사실 때문에 굳어버린 대원들도 꽤 있었다. 놀랍게도 윌리엄 파슨스 대령도 그 중 하나였다. 에놀라 게이는 방사능을 띈 버섯구름이 점점 확산되자 관측을 멈추고 다시 전속력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후미 기총수 밥 캐런의 증언에 의하면 폭격 후 1시간 반이 경과하여 히로시마에서 무려 667km나 떨어진 지점에서도 버섯구름은 그때까지 보였다고 한다.[* 히로시마에서 667km 거리면 대략 [[인천광역시]]나 [[원산시]] 인근인데, 저 위치에서도 버섯구름이 보였다는 것이다.] [[파일:Spaatz_decorated_Tibbets.jpg]] 타격을 끝낸 3대의 B-29는 총 14시간의 작전 비행을 마치고 오후 3시경 티니안 기지에 착륙하였다. 그레이트 아티스트와 빅터 91은 환영 행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중간에 일부러 속도를 늦추어 에놀라 게이가 티니안에 먼저 도착할 수 있도록 했다. 태평양전략공군사령관 칼 스파츠(Carl A. "Tooey" Spaatz)[* [[미합중국 유럽전략공군| 유럽전략공군]]사령관이었다. 태평양전략공군이 창설되면서 유럽에서 넘어왔다. 후일 초대 미국공군참모총장이 되는 인물.] 대장은 [[수훈십자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을 미리 준비해놓고 활주로에서 기다리다가 티비츠 대령이 에놀라 게이에서 내리자마자 훈장을 수여했다. 티비츠는 훈장 수여를 전혀 예상 못했기 때문에 위의 사진에 보이듯이 왼손에 담배 파이프를 들고 있는 상태였다. 윌리엄 파슨스 대령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작전의 마지막 업무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는 몇 주 전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s-2]]를 통해 전달 받은 리틀 보이 우라늄 발사체 인수증 원본에 사용 기록을 추가로 기재하고 서명했다.[* 스티븐 워커, 위의 책, p. 385.] >The above materials were carried by Parsons, Tibbets & Co. to Hirohito as part of “DOOMSDAY”, leaving Tinian at 051645 >상기 물품들은 05시 16분 45초에 티니안에서 출발하여, 파슨스 및 티비츠 등[* 센스 넘치게도 마치 택배를 배송한 것 처럼 적었다.]이 [[히로히토]]에게 "최후의 날"의 일부분으로서 [[택배|배송]]하였음. || [[파일:atomic-bomb-receipt-photo-495x640.png|width=100%]] || || 윌리엄 파슨스를 비롯한 여러 관계자가 서명한 원자폭탄 인수증 원본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